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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simonG-84 2023. 10. 15.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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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주변국의 역사 알아보기 2탄은 중국의 역사 알아보기다.

흔히 중국의 역사는 중국은 56가지 민족이 문화적으로 섞인 다민족국가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는 중국 대표민족인 한족의 역사라고 보기 힘들다. 중국 역사상 이민족의 통치역사가 상당히 길며 그들의 역사를 제외하면 중국의 제대로 된 역사에 이가 듬성듬성 빠진 듯한 역사가 되어버린다. 하여 중국의 역사엔 거란족, 흉노족, 동이(한국의 한족을 동쪽의 오랑캐라 하여 부르는 말), 몽골족 등 이민족의 역사가 함께 쓰일 수밖에 없으나 중국 특유의 중화사상[중국이 세계중심이다란 사상]으로 인해 이 이민족을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취급하여 이민족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인양 멋대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중국식 역사왜곡)을 수시로 진행하고 있어 국제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바도 상당하다. 

 

하여 오늘의 포스팅은 순수하게 중국의 역사를 열거하는 진행이 아닌 중국이 자행하는 동북공정을 지적하는 내용이 포함될 것이다.

1.하상주 중국고대사

구석기, 신석기시대를 지나며 중국에 최초로 등장한 나라는 삼황오제 이후 나타난 하(夏)나라이다. 하지만 하나라와 다음 왕조인 상나라(=은나라)는 사실 제대로 된 유물의 발견 등 역사적 사실의 증명이 안되어 전설 속의 국가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은나라의 수도 '은허'지역에서 중국의 고대문자 갑골문자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정설상 최초의 국가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이는 중국 최초의 국가가 몽고/여진/말갈/한민족 등의 원류인 동이족이 세운 상나라임이 밝혀지자, 중국 정부가 상나라보다 앞선 시대에 전설로만 전해오던 하나라를 정사로 둔갑시켜 끼워 넣은 거짓 역사이다. 이 작업은 '동북공정'의 수법과 마찬가지로 '하상주단대공정' 및 '중화문명탐원공정'이라 불리는 역사왜곡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참고 : 이덕일의 한국통사 p.43). 따라서 중국 최초의 국가는 商[상](=殷[은])나라이다. 하나라의 유적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은나라를 대표하는 은허지역 출토유물은 훗날 백제유물과의 연관성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에 등재된다)

 

(BC 2070) BC 1046년, 서쪽에서 나타난 주(周)족이 상을 멸하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주는 서주와 동주로 구분한다. 서주는 수도를 호경(=서안)에, 동주는 수도를 낙읍(=낙양)에 뒀을 때로 구분한다 (BC 770년 견융의 침입으로 서안에서 낙양으로 이주)

2. 춘추전국시대
춘추시대와 전국시개로 나눠어 두 시계를 살리는 사건 진나라 위, 조, 한 갈리면서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 시대가 시작된다. 춘추시대엔 주나라의 왕조를 인정하고 스스로는 공으로 칭했으나 전국 시대엔 주왕조를 무시한 채 서로가 왕을 칭하며 7개의 강대국이 통일을 위해 전쟁을 펼치며 진시황의 진나라가 최종 통일한다.

특히 이 시기에 6세기 공자를 시작으로 노자, 맹자, 묵자, 장자 중국의 대표적인 성현들이 등장한 시기이며 전쟁의 와중에 병법을 다룬 손자병법이 등장한다.

 

3.진나라

BC 221년, 진(秦)나라진(秦) 나라가 마침내 전국 통일을 이루며 전국 시대는 끝이 난다. 진시황은 북방의 흉노를 경계하여 곧바로 만리장성 축조에 들어감과 동시에 주(周)가 시행했던 봉건제를 폐지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를 실시한다. 진시황은 법률, 문자, 화폐, 도량형을 통일시키는 등 사회 발전에도 기여하였지만 아쉽게도 잔인한 폭정과 BC 213년에 벌어진 분서갱유라는 희대의 사상, 언론 탄압책을 실시하여 오늘날까지도 폭군의 대명사가 된다. 

 

4.한나라

BC 210년, 진시황이 죽자 그동안 폭정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반란이 '진승/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잇따라 일어난다. 그리고 마침내 유방에 의해 진나라는 멸망한다 (BC 206). 이후 항우와의 패권 경쟁에서 결국 최종 승리를 거둔 유방이 한(漢)나라를 세우니 그가 바로 한고조이다 (BC 202년)[초한지의 한의 유방과 초의 항우가 대결]

무제는 BC 141년 즉위 후 BC 87년까지 장장 54년간 한을 통치하면서 추은령을 만들어 제후국의 영지를 축소시키는 한편,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등 황제 중심의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여 동서의 길이가 오늘날의 중국 지도와 거의 맞먹는 거대한 국가를 완성한다. 한무제는 BC 108년에는 고조선까지 멸망시키며 요동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한다.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왜구사학 vs. 민족사학의 결투! 

(출처 : STB 상생방송 캡처화면)

https://youtu.be/ude9gT-VWKY?si=t9f8LkM4U3kwzueJ

 

AD 8년 왕망이 한나라의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은 망하게 된다. 여기까지를 전한이라고 한다. 왕망은 한나라를 이름만 바꿔 신(新)나라로 부르며 15년간 통치했지만, 23년 멸망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단명한 왕조가 된다. 25년 유수(=광무제)가 다시 한나라를 건국한 후 낙양에 도읍하며 왕위에 오름으로써 후한이 등장하게 된다. 105년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고, 장형은 세계 최초로 혼천의를 만들었고 132년에는 또다시 세계 최초로 지진계를 만들었다.

 

광무제의 아들인 명제 이후 황제들은 극히 단명하여 어린 황제들이 잇달아 등극하니 외척과 환관들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견디다 못해 스스로를 청류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반환관 운동에 앞장서지만 166년과 169년 두 번에 걸친 '당고의 금'으로 청류들이 대거 청소되어 버린다. 황실은 환관과 외척 세력에 의해 완전히 놀아나고, 농민들은 가뭄과 홍수 등으로 배고픔에 쓰러져 가던 차에, 이들 앞에 '태평도'와 '오두미도'라 칭하는 신흥종교가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시키니 태평도는 마침내 184년 신도인 농민들을 앞세워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다.

이후는 유명한 국지의 시대이다.

 

5. 삼국지의 삼국시대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왕위를 빼앗으며 위나라를 세운다. 이어 221년에는 유비가 촉한을, 229년에는 손권이 오를 각각 세우니 중국은 삼국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유비가 죽고 유선이 제위를 잇자 제갈량은 그 유명한 출사표를 바친 후, 장장 7년에 걸쳐 위를 6번이나 공격한다. 하지만 위의 명장 사마의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갈공명은 전쟁터에서 죽게 된다. 결국 263년에 촉이 먼저 멸망한다.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은 진(晉=서진)나라 세운 후 280년에 오까지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후 316년 까지를 서진, 317~420년의 시대를 동진이라고 한다.

 

6. 5호 16국 시대

304년부터는 북방의 유목 민족인 흉노, 선비, 저, 갈, 강이 남하하여 대륙을 지배하는 5호 16국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둔황의 막고굴이 동진 시기에 만들어진다. 북방의 유목 민족이 남하함에 따라 남쪽으로 달아난 한족으로 인하여 강남(양자강 유역)이 크게 번성하게 된다. 한족이 사라진 화북은 5호가 16개의 나라를 세워 서로 경쟁하게 된다.

양자강(양쯔강)을 경계로 북위는 이민족이 점령 전쟁 / 중국의 한족은 양쯔강 남쪽 지역을 이동 남조(송, 제, 양, 진) 국가를 건국과 멸망을 하여 북위와 남조로 나눠어 쓰인 중국의 역사 시기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이다.

 

5호 가운데 선비족이 북위(北魏)를 세워 439년에 나머지 나라들을 전부 통합하며 화북지방을 통일한다. . 이로써 5호 16국 시대는 끝이 난다. 589년, 수문제 양견은 중국을 재통일하며 수나라를 세운다. 덕분에 수문제는 오늘날까지 거대 중국의 초석을 다진 1등 공신으로 인정받고 있다.

 

220년 조비에 의해 (후)한이 망한 이후 589년 수나라의 성립까지의 기간을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라 부르며, 북위가 화북 지방을 통일한 439년부터 수나라가 성립한 589년까지는 남북조시대라고 부른다.

 

7.수나라

양견( 수문제)이 무력으로 대륙을 통일했다면, 아들인 수양제는 남북을 관통하는 대운하를 만들어 대륙의 실질적인 통일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중국의 지리적 특성상 2개의 큰 강인 황하강과 양쯔강을 연결하고 북쪽의 수도 베이징과 남쪽 최대 상업도시 상하이를 연결해 주는 대규모 토목사업)

 

중국 역사상 큰 토목공사는 멸망의 지름길이라 표현하는데 그 대표가 되는 것이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수양제의 대운하건설이다.

 

수문제는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수양제가 다시 612년에 113만 명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재침공하지만 역시 실패(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한다. 그 후 매년 고구려를 헛되어 침략한 수양제는 결국 돌아선 민심으로 인하여 618년 자신의 친위대장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8.당나라

618년 이연(=당고조)이 당나라를 세운다. 아들인 태종(=이세민)은 '정관의 치세'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조공을 바치지 않던 고구려를 밉게 보던 중 마침내 연개소문의 반란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를 침공한다. 하지만 안시성의 양만춘에게 패배했고 이후에도 다시 침공했지만 또다시 실패한다. 태종은 재침공을 준비하던 중에 결국 수은 중독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690년 측천무후가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武周)라고 칭하지만 705년 중종이 복위하며 다시 당 왕조가 복원된다. 현종 때 양귀비와 이백과 두보가 등장한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 현종이 장안에서 서쪽 촉으로 도망가던 중 양귀비는 화난 군사들의 압력에 의해 길에서 죽고, 현종은 곧바로 아들인 숙종에게 양위하게 된다. '안사의 난' 이후 권위가 쪼그라든 황실에선 환관들이 다시 득세하고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해져 간다. 875년 '황소(사람이름)의 난'이 일어나 수많은 농민들이 이에 가세한다. 하지만 주온의 배신으로 884년 황소가 자결하면서 난은 끝나게 된다.

 

※안사의 난(=안녹산의 난)

당나라 후기 변경백과 비슷한 지방의 군권을 일임받는 직책의 절도사 안녹산은 양귀비의 총애를 받는 인물. 당시 황제인 당현종은 자신의 며느리인 양귀비를 사랑하면서 양귀비의 치마폭 정치가 시작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양귀비의 오빠인 안국충은 안녹산의 총애가 달갑지 않은 경쟁상대였고 이 관계의 심화는 안녹산 즉 지방의 군인세력인 절도사 안녹산의 장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 침공 점령당한 반란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나라는 위구르족(티베트지역 소수민족)을 손을 벌럼-위구르족의 도움으로 수도 탈환 및 안녹산의 후임자였던 사사명으로 이어져 계속된 반란을 정리함.

양쯔강의 발원지인 티베트지역의 위구르족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피박 받던 소수민족이었음-역사에 만약은 없겠지만 위구르족이 반란 진압이 아닌 당나라의 점령 야욕을 벌였다면 오늘날 중국 역사는 많은 점이 바뀌었을 것이다. 

 

907년 주온(=주전충)은 후량을 세움으로써 290년에 걸친 당나라는 망하고 5대 10국 시대를 열게 된다.

9.송나라

송의 시조 조광윤은 절도사 출신임에도 절도사가 벌인 안녹산의 난(=안산의 난)을 상기하여 무인을 배척하고 문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문치주의 펼쳤다. 이는 주자와 같은 주희(=성리학)의 발전을 도모되었지만 국방력의 약화로 요와 금(여진족과 거란족 최후의 몽골족의 공격을 허용하여 송나라 패망의 원인이 된다.

 

960년 후주의 조광윤이 송나라 건국하면서 5대 10국 시대는 끝이 난다. 한편 한반도 북쪽에서 916년에 건국하여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며 만주 전역을 장악한 거란족(=요)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으로 진출한다. 이후 요와 송은 서로 싸우다가 1004년에 전연에서 화의를 하며 송은 요가 획득한 연운 16주를 인정하는 외에 매년 조공까지 바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게 된다.

 

발해 멸망 이후 만주의 여진은 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아구타(여진족 추장)는 1115년에 금나라를 세우는데 이후 요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며 영토를 넓혀 나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송은 연운 16주를 돌려받을 심산으로 1120년에 금과 동맹을 맺고 요를 협공한다. 하지만 금은 약속대로 장성 이북을 모조리 점령한 반면에 송은 연경조차 공략에 실패한다. 결국 송은 금에게 연경 함락을 부탁하여 성공시킨다. 

 

연경이 함락되자 요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는 서쪽으로 도망가 서하에 숨었지만 1125년 금에 체포되면서 요는 마침내 건국 210년 만에 멸망한다. 살아남은 요의 귀족들은 서쪽으로 도망가 요나라를 재건했는데 이를 서요라고 부른다. 요와 전쟁을 하며 송의 허약함을 눈치챘던 금의 공격으로 1126년 송은 멸망한다. 여기까지가 북송이다. 북송 휘종의 아들 조구(=고종)는 강남으로 피난해 임안(=항저우)을 중심으로 송의 피난 정권을 수립하는데 이것이 남송의 시작이다

 

10. 원나라

1215년 칭기즈칸이 금의 수도인 연경(=북경)을 점령하면서 몽고족이 황하 이북을 차지하게 되는데 1234년에는 결국 금을 멸망시킨다. 1279년에는 쿠빌라이가 남송을 멸망시키며 몽고인은 중국을 송두리째 정복한 최초의 민족이 된다. 쿠빌라이는 수도를 금의 수도였던 북경으로 옮기고 국호를 (元)으로 칭한다.

한국의 역사상 고려도 삼별초군을 조직, 강화도 수도 이전 등 몽골제국군에 끝까지 항쟁했으나 멸망을 길을 걷게 된다.

 

11.명나라(한족 최후의 중국왕조)

1351년부터 몽고족을 내쫓고 한족 왕조를 되찾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단의 홍건적 무리가 난을 일으킨다. 홍건적은 원과 공방을 벌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원에게 밀리게 되고, 마침내 1363년에 주모자 유복통이 원의 군대에게 죽으며 반란은 실패로 끝난다. 한편 홍건적의 일단을 맡고 있던 주원장은 약탈을 일삼던 다른 홍건적들과는 달리 원에 맞서지 않고 강남의 안정에 힘을 기울여 강남의 지주와 사대부들의 마음을 산다. 주원장은 마침내 1368년 남경에 명(明)나라를 세우며 한족의 부활을 선포한다. 주원장은 곧바로 북으로 진출해 화북 일대와 원의 수도 북경을 점령한다. 이로써 100년간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몽고족인 원은 멸망하게 되는데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주원장이 몽고족을 장성 이북으로 쫒았으나 몽고족은 수시로 장성 이남을 넘보았고 마침내 다시 몽고족을 통합한 타타르는 1550년 '경술의 변'을 일으킨다. 이 무렵 왜구들의 남해안 노략질도 기승을 부렸는데 이를 총칭하여 '북로남왜의 화'라고 한다.

※경술의 변-북원을 계승한 타타르의 군세에 북경을 포위당하며 함락 직전 중국 각지에서 모인 원군에 의해 북경의 함락은 막아내었다.

 

명나라 대에 농업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전국의 개간지가 크게 늘었으며 송나라 때부터 발달한 상업의 영향으로 대상(大商)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왕양명은 양명학을 창시했다. 1580년에는 마테오 리치가 마카오에 도착하여 이후 중국에 천주교를 전파하게 된다.

 

1592년 일본이 정명가도(征明假道)의 깃발을 들고 16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들이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은 전쟁터를 조선에 묶어두기 위하여 원군을 파병한다. 1616년 몽골의 동쪽에 살던 여진족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후금을 건국한다. 후금은 1619년 랴오둥 지역을 명으로부터 빼앗는다.

 

누르하치가 죽자 숭덕제(홍타이지)가 뒤를 잇는다. 그는 장성 이북의 몽골족을 통합한 뒤 원제국의 옥쇄를 손에 넣음으로써 후금은 장성 이북의 몽골 지역까지 차지하게 된다. 1636년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다. 이후 장성을 경계로 명과 청은 여러 차례 격돌한다.

12. 청나라

1644년에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봉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고 숭정제 의종이 자살함으로써 명나라가 멸망한다. 이자성은 장성을 지키던 오삼계에게 힘을 합쳐 오랑캐 청을 물리치자 제안하지만 오삼계는 오히려 명황제의 복수를 내걸며 청과 손을 잡고 함께 북경으로 입성한다. 이후 한족의 명나라 부흥운동이 1664년까지 이어지는데 이를 남명(南明)이라 한다. 1645년 청은 한족 모두에게 강제적인 변발을 명령한다.

 

1673~1681 사이에 명을 재건하겠다는 삼 번의 난이 일어났지만 진압됐다. 1683년 청은 대만을 정복함으로써 중국의 통일을 완성한다. 이후 청은 강희제(1662~1722), 옹정제(1723~1735), 건륭제(1736~1795)의 황금기를 보내며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250년간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된다.

지금의 중국의 영토는 사실상 원나라(몽골족)와 청나라(여진족)가 국경선을 확장해 준 꼴이며 중국이 중화사상이라며 떠드는 한족의 마지막 국가였던 명나라는 지금 중국영토보다 훨씬 좁은 국토만 점령하였다. "한마디로 죽 쑤여 개준꼴"

 

여기까지가 중국의 고대사에 해당한다. 이후의 역사는 근대화가 빨랐던 서양사회에 비해 늦은 근대화로 서양의 대항해시대에 식민지배 당하는 동양사회가 벌어진다. 

 

 

13. 중국의 근현대사의 시작 아편전쟁

1840년 영국과 청 사이에 아편전쟁이 벌어진다. 그동안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며 최고라고 자만하던 중국은 영국의 힘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고 결국 1842년에 영국에 손을 들며 굴욕적인 '남경(=난징) 조약'[홍콩이 영국령이 됨]을 체결한다. 하지만 여전히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중국 내륙으로의 진출이 금지되어 자국의 상품 판매가 부진하자 영국은 프랑스와 손잡고 1856년에 광주를 공격하며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는데 이 결과 '천진조약(1858)'과 '북경조약(1860)'이 체결된다.

 

※ 천진조약과 북경조약은 중국이 추가로 10개 항구를 개항, 외국인의 내륙여행 권리를 인정, 구룡반도를 영국에 할양, 연해주를 러시아에 양도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 아편전쟁-영국은 서양세계의 동양 판타지에 중국으로부터 도자기, 비단, 차 등을 다수 매입하여 서양에 판매하는 무역이 성행한다. 하지만 영국은 중국에 팔 것이 많이 없어서 결과적으로 은이 대량으로 중국으로 빠져나갔다. 영국 정부는 은을 환수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마약)을 몰래 중국에 퍼뜨리기 시작했다. 청조정은 영국의 아편을 몰수하고 바다에 폐기처분하며 영국왕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영국은 자신들의 재산인 아편을 함부로 폐기한 대가를 요구하는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아편전쟁이다. 영국의 승리로 말미암아 청에게 불리한 불평등조약을 연속 체결하면서 청을 몰락의 계기가 된다.

 

이민족인 청왕조의 잇단 패전으로 한족들은 청 왕실의 힘을 얕보게 된다. 1851년에 광시성에서는 의 지배를 거부하며 크리스트교 국가를 목표로 하는 태평천국군이 일어난다. 이들은 양자강 유역을 지나 난징까지 점령한다. 하지만 내분으로 인하여 1864년에 자멸하다시피 사라진다. 

 

두 번에 전쟁에서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은 청나라는 서양의 문물을 힘써 배우되 윤리도덕과 정치사상은 중국 전통의 것을 따르자는 양무운동을 일으킨다.

 

양무운동의 원인은 청나라가 영국에게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태평천국으로 인해 중국내부의 갈등이 극도에 달한 데서 시작합니다. 양무운동의 내용으로는 중국을 근대화시켜 서구열강에 대비하기 위해 시작되었는데요. 기본적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고 중국을 강하게 만들자는 부국강병운동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중체서용(중화사상 때문에 제도나 사회개혁은 현행체제를 유지한 체 무조건 서양의 기술력만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이라는 슬로건 자체가 명확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일어난 메이지유신과 비교당하고 합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에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인데요.

양무운동의 주된 활동이 군사적 개혁이었는데 일본에게 패배하고 내부적인 문제들이 겹치게 되면서 결국엔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양무운동의 결과 곳곳에 군벌이 조성되면 대륙은 다시 혼란에 빠져듭니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군 세력이 약화되고 있던 1860년에 시작되어 1894년까지 이어진다. 이를 통해 중국은 근대적 산업, 공업시설을 크게 확충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홍장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1884년 청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베트남을 프랑스에 내주게 된다. 전쟁마다 연패하는 청을 만만하게 보게 된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이홍장의 북양함대를 괴멸시키며 승리한다. 청과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일본은 대만과 요동을 빼앗지만 러시아의 주도로 '삼국 간섭'이 일어나 일본은 요동을 다시 청에 반납한다.

 

※청불전쟁의 패배로 천진조약(=텐진조약): 베트남에서 청나라 군대 철수 및 개입 불가 사실상 프랑스령으로 전환

※시모노세키 조약(=청일강화조약): "청은 조선에서 손을 뗀다. 타이완을 일본에 넘겨준다. 일본의 4년 치 예산에 해당하는 돈을 일본에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 조선의 점령권 당위성 확보 및 타이완(대만)의 식민지화 선언

※ 삼국 간섭 -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라오둥반도를 점령하자 러시아의 주도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반대하여 청에 반환하게 한 사건

=> 추후 일본이 영국을 끌어 들어 러일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된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서태후와 이홍장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며 정치개혁 주장이 일어난다. 캉유웨이(康有爲)가 개혁의 시급함을 황제 광서제에게 건의하여 가납되지만, 서태후와 내통한 원세개의 배신에 의해 거사 직전에 광서제는 유폐되고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1899년 부청멸양(扶淸滅洋)을 내건 의화단이 봉기하여 모든 서양세력에게 청을 떠나라고 통고한다. 의화단의 요구에 불복한 서양 세력은 서태후에게 의화단의 진압과 서태후의 퇴진, 광서제의 복위를 주장한다. 노한 서태후는 의화단을 북경으로 불러들여 모든 외국인과 그 세력들을 공격하지만 도리어 서양 연합군에 의해 북경은 파괴되고 자금성을 약탈당한다.

1901년 청은 서양 11개국 대표와 신축조약(=북경의정서)을 체결한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청왕조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했고 급기야 '청을 몰아내지 않고는 외세를 물리치지 못한다'라는 기류가 형성됐다. 부청멸양이 반청 혁명의 열기를 높였으니 참으로 역설적인 결과였다.

 

※북경의정서 - 외세배척운동을 철저히 탄압할 것이며, 만일 지방관이 진압하지 못하면 즉시 파면하며 영구히 등용하지 못한다. 북경과 상하이에 외국 군대가 주둔한다 등의 내용

서태후

서태후(西太后, 1835~1908)는 청나라 말기, 남성 위주로 돌아가던 정계에서 태후로서 황제 2명의 섭정을 하면서 48년을 철권통치했던 여인이다.
(10대 동치제, 11대 광서제)

출신은 비천했으나 황제를 갈아치우며 섭정을 하면서 권력 남용
1) 황제의 후궁이 되어 옥동자를 낳고 귀비로 승진

   출신도 불분명, 17살에 수녀로 선발되어 청의 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    되어 함풍제를 유혹 성공, 귀인의 직급을 받고 아들을 낳는다

2) 아들이 황제(동치제)가 되자 섭정 실시

   1861년 함풍제가 승하, 6살인 서태후의 아들이 동치제로 즉위-섭정 시작

   동치제는 어쩌서인지 생모인 서태후가 아닌 모후황태후를 더 따랐는데

   서태후는 황제인 동치제의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워하고 역정을 내

   는 것도 모자라 황제의 황후 처소 출입마저 막았다.

   동치제의 나이 겨우 19살 때 황후가 임신 중이었음에도 제위 계승의 원

   칙을 무시하고 쫓아냈다. 추후 동치제에세 유곽을 소개했다고 한다.

   정사에선 원인불명의 병으로, 야사에선 동치제의 사망 원인이 사창가에

   옮은 매독이 원인이라는 설이 존재하며  1875년 동치제가 사망한다.

 

생모인 그녀는 성모황태후, 함풍제의 정실황후는 모후황태후로 채택- 물론 같은 태후라 할지라도 모후 황태후인 동태후가 지위도 높고 법적 정당성이나 명령의 권위 또한 더 높아 눈밖에 나면 쫓겨날 수도 있었다. - 1881년 일부러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계단에서 굴러 동태후 뇌진탕으로 사망하여 서태후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3) 동치제가 사망하자 자신의 조카를 황제(광서제)로 세우다
    여동생과 시숙 사이에서 난 4살밖에 안 된 조카(광서제)를 양자로 들여 제위- 섭정 실시

4) 환갑잔치를 위해 이화원 재건축 지시- 이화원을 재건축에 무려 국가 1년 예산의 30%인 은 3천만 냥이나 소모

5) 만신창이 되어 무너진 제국의 마지막 부흥기회조차 권력욕에 눈이 멀어 말아먹다.

   1898년 광서제 서태후의 간섭에 질려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와 공모, 신정을 실시하여 입헌군주제 꾀하였다.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

   추겨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로 종식하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戊戌政變) 실시.

   이 여세를 몰아 서태후는 의화단(義和團)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용해 유럽 열강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8개국 연합국의 침입을 초

   래, 서태후는 결국 서안(西安)으로 피신했다.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그녀도 만년에 이화원에 돌아와 진보적 개혁과 입헌준비, 교육진흥 등 신정을 펼치려 했지만 대외적으로는 굴욕적

  외교로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10년간 유폐되었던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누군가 보낸 독약을 먹고 38세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서태후는 그 즉시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농제 푸이

   였다.

   1908년 11월 15일 생을 마쳤다. 향년 72세 사망. 서태후의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했다.

   출처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http://www.koreahiti.com)

 

1905년, 쑨원의 주도로 민족, 민주, 민생주의의 '삼민주의(三民主義: 民族, 民權, 民生)'를 내세운 중국혁명동맹회가 출범한다. 

1909년 청조가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와 철도를 건설해 국유화하려고 하자 각지에서 반발이 일어나는데, 청조가 이들을 과격하게 진압하자 국유화반대운동은 아예 청조타도 운동으로 발전한다.

실제 서양국가에 철도 건설을 골자로 한 청나라 국채 발행 실시 이후 청나라의 폐망과 함께 중화민국은 청나라의 후임국임을 거부, 채권은 100년 넘게 종이쪼가리로 전락했다.

 

마침내 1911년에 우한에서 혁명파 군인들이 청조 타도를 외치며 봉기한다. 이를 신해혁명이라고 한다이들 혁명 세력들은 쑨원을 임시 중화민국의 대총통으로 선출한 후 1912년에 남경에서 중화민국이라는 혁명 정부를 선포한다.

 

하지만 열강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청조의 정치적 실세 위안스카이가 이들을 진압해 오자 위기를 느낀 혁명 정부는 결국 만주족 황제의 퇴위와 공화정의 실시라는 조건을 내걸고 아예 총통의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물려준다. 위안스카이는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퇴위시킨 후 혁명 정부와의 약속을 어기고, 1916년에 자신이 황제에 즉위한다. 이에 국민들이 '제2혁명', '제3혁명' 등을 일으키며 거세게 반발하자 위안스카이는 불과 두 달 만에 황제 제도를 취소한다. 위안 스카이는 최측근이 그의 독재에 질려 돌아서 버리자 충격을 받아 죽는다.

 

1919년에 5.4 운동이 일어난다. 1920년에 쑨원은 중국 국민당을 창설한다. 1921년에 공산당이 창설된다. 1924년에 제1차 국공합작이 일어난다.

 

※ 신문화 운동과 5.4 운동 -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변혁만이 아니라 의식적인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정신혁명을 제창한 신문화운동이 일어났다. 이 신문화운동 기간 중, 일본의 대중국 21개 조 요구에 대한 철회운동으로부터 반일운동이 전개되고,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북경소재 각급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5.4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일반적으로 5.4 운동이라 부른다.

 

※1차 국공 합작 - 공화정 상태의 국민당은 당시 식민지를 지배하는 서양열강에 대항하고자 중국을 끌어들이려는 소련과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필요로 하는 중국 국민당의 서로 간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정치적 이념을 떠나 합작 후에 군벌과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황포군관학교가 설립하는 등 위화감 없이 합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1925년 3월에 쑨원이 사망하고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우파가 국민당의 당권을 잡으면서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 1927년 7월 13일에 공산당이 국공합작의 종료를 선언하고 7월 15일에 왕징웨이가 정변을 일으키면서 국공합작은 결렬되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자유민주주의 선택했다.

[출처] 제1차 국공합작(1924-1927)|작성자 shiroyume

 

위안스카이의 죽음 후 군벌들의 패권다툼이 계속되자 1926년 국민당의 장제스 사령관은 광동에서 북경까지 북벌을 단행하여 난립한 군벌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1927년 이후 장제스는 공산당을 박멸하기 위해 공산당과 치열한 전쟁을 거듭한다. 궤멸 상태에 빠진 공산당은 8/1일 남창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이 일어난다. 11월에는 모택동을 주석으로 한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다. 일본은 1932년 3월에 쫓겨난 부의를 앞세워 만주를 독립시킨 후 일본의 괴뢰 정부로 만든다. 장제스는 안내양외(安內壤外)의 기치를 내걸고 공산당과의 싸움에 진력한다.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다.

 

※ 안내양외(安內壤外)의 기치 - 중국 국내의 공산당을 일소한 다음 일본의 침략을 막겠다는 정책

만주사변 -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30분경 류탸오후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쉐량 지휘하의 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관동군은 만주 침략을 개시하였다.(이아 류타오후 사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전투를 말한다.

제2차 국공합작 - 제2차 국공 합작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뒤이어 1937년 중일전쟁의 공산당과 국민당이 일본제국에 대한 공동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연합한 것이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1945년까지 지속되다가 일본군 점령지의 배분 문제를 놓고 결렬되었고, 제2차 국공내전으로 이어졌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국 본토로의 일본군 진격은 베이징 함락, 상하이 함락 그 후 국민당이 수도로 삼았던 난징을 점령하면서 난징대학살이 이루어진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선언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내전에 돌입하는데 1946년에는 국민당이 우세했지만 1948년이 되자 공산당이 우세해졌다. 국민당 정부는 부패한 반면에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땅을 가질 수 있었고 부패한 관리로부터의 착취가 없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꾼 공산당 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1949년 4월, 인민해방군은 양자강을 건너 난징과 상하이를 차지한다. 10월에는 북경에서 오성홍기를 국기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주석에는 모택동이 임명되었다. 11월에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의 임시 수도로 삼았던 충칭도 함락된다. 제2차 국공내전의 공산당의 승리였다.

결국 12월에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피신한다.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진 지 38년 만에 새로운 통일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중국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을 국내에서 축출하고 사회주의를 표방한 공산국가가 되었다.

 

※난징대학살 - 앞서 일본의 역사 편에서 설명했던 추정 사상자만 30만 명에 이르는 난징 점령과정에서 항복 거부로 일어난 6일간의 대학살과 군부의 민간인 강간사건이다. 일본의 몰상식한 전쟁범죄의 진실이며 일본군은 이 사실을 65년간 은폐 축소하고자 했다.

난징전범재판

난징전범재판은 1946년 8월~1947년 2월까지 난징에서 B급, 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1천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460여 건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에 관해 증언했었다.

1947년 2월 6일, 다니 히사오에 유죄판결이 내려지면서 3월 10일 다니 히사오 중장은 전쟁법과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고 자신의 군대가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한 것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으면서 공개총살이 집행된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인을 심판한 재판이다. 도쿄 재판이라고도 한다. 60여 명 이상의 전쟁 범죄 용의자로 지명된 사람 중 28명이 기소되어, 판결 이전에 병사한 사람 2명과 소추가 면제된 1명을 제외한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중 난징 대학살에 관련된 전범들 가운데 당시 난징대학살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王)는 일본 황족이란 이유로 처벌을 면해, 재판소에 출석하지 않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는 사형판결을 받아 교수형을 당했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이었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도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했다. 하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은 난징대학살 당시 주요 범죄자들이 단 한 명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점이 한계다.

출처:https://ko.wikipedia.org/wiki/위키백과[난징 대학살]

 

난징 대학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강가에 쌓인 대학살 희생자들의 시체 더미와 일본 군인의 모습. 당시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항복한 중국군과 민간인 남성들을 대량 총살하였다. 난징

ko.wikipedia.org

 

1950년 중국은 티베트를 점령한다. 1966년에는 권좌에서 밀려난 모택동이 다시 권력을 잡고 당권파를 숙청하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여 일으킨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여 3년간 중국을 휩쓴다. 1972년에는 역사적인 미중수교가 이루어진다. 1976년 모택동이 죽고 등소평이 집권한다.

 

모택동이 일으킨 극좌적 운동 문화대혁명은 문화혁명은 혁명도 아니었고, 사회주의도 아니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의 배경과 시작
1949년 중국 혁명은 지주 제도를 폐지하고,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국민 국가를 세운 민족해방 혁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신 중국 건국자들은 부국강병 국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런 비전 속에서 마오쩌둥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대약진운동’이라고 부른 엄격한 자립경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평등 분배를 강조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다 같이 많이 가져가기 위해선 생산량을 늘려보자 운동이 대약진운동의 모티브, 그 중심이 바로 농업 생산량+철강 생산량의 확장이었다. 

 

농업 생산량을 위해 대약진운동은 농촌집단화로 시작되었다. 초기에 중공정권은 지주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소작농에게 무상 배분하는 형태로 사적 소유를 인정했지만, 점차 마을 단위의 집단소유제도로 전환했다. 집단소유는 인민공사(人民公社)라는 조직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원리는 간단하다. 인민공사가 토지는 물론 가옥, 가축을 소유하고 각 부락의 행정기능을 맡았다. 농민은 집단으로 생활하며 공동으로 생산에 참여했다. 인민공사는 세금을 거두고 학교, 은행, 탁아소, 공공식당, 탁아소, 노인정, 공동묘지를 세우고 관리했다.

여성은 가정에서 해방되었다. 식사는 공동식당에서 함께 했고, 빨래도 공동으로 했다. 다만 가족은 해체하지 않고 한 지붕 밑에서 살았다. 독거 가족, 즉 노인이나 고아 등은 집단에서 수용했다.

농촌에서 인민공사가 성공했다고 평가되면서 도시에도 인민공사가 조직되었다. 도시공사 가운데 모범적인 곳이 허난성 정저우(鄭州)의 홍기공사(紅旗公社)였다. 이 공사는 방직공장 내에 설치되어 4,000여 가족에 1만 8,000여 명을 수용했다. 회사 하나가 큰 마을을 이룬 셈이다. 조직원들은 잡단생활을 했고, 인민공사가 공장 주변에 포목 전, 식당, 유치원, 학교, 은행, 영화관등을 세워 관리했다. 공장 주변에는 조직원들이 먹기 위한 가축 축사가 있었고, 여성근로자가 출근한 후 봉사조직이 가정일을 대신해 관리해 주었다.

집단생활은 생산성을 높일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 것이 아닌 것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다. 내 것과 우리의 것은 다르다. 내 땅, 내공장, 내 가게라면 밤을 새울 터인데, 우리의 것에는 대충 일을 했다. 생산성이 늘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사적 공간이 없어지면서 사생활이 사라진데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모택동은 어느 날 참새를 보고 “저 새는 해로운 새”라고 지적했다. 참새가 곡식 낱알을 먹으면서 인민들에게서 노동의 결실을 도둑질한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모독동은 참새, 모기, 파리, 들쥐 등 4가지 해로운 동물을 제거하는(除四害) 운동을 벌였다.

모택동의 지시로 전 인민이 동원되었다. 중국인들은 새를 잡는데 동원되었고, 새가 내려앉지 못하도록 냄비와 프라이팬, 북을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주었다. 중국 전역에서 참새 둥지가 허물어졌고, 알은 깨졌다. 어미 참새는 총에 맞아 죽고, 새끼 참새는 둥지에서 죽였다. 참새를 많이 잡은 정부기관과 작업반에게 죽은 새의 부피를 달아 상과 표창을 주었다.

그 결과 참새가 멸종 위기에 빠졌다. 2년 후에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참새가 곡식만 먹는 게 아니라 해충도 잡아먹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새가 멸종되자, 이번엔 메뚜기 떼가 중국 전역을 뒤엎었다. 인간이 먹이사슬을 건드리니, 생태계의 질서가 무너지고, 불균형이 생긴 것이다.

이 운동의 결과로 쌀 생산량이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급락했다. 이어 3년 대기근이 촉발되고 수천만명의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하는 수 없이 소련에서 참새를 공수해 생태계를 복원할 수밖에 없었다. 20억 명을 동원한 코미디였다.

 

소련의 기술자들이 철수함에 따라 철강 생산에도 빨간불이 켜진다. 철(鐵)은 산업의 기초소재다. 모택동은 철의 생산을 늘리는 것이 산업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파악했다.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모택동은 기이한 방식으로 철을 증산하려 했는데, 그것이 마을 단위의 토법고로였다. 1958년에 전국적으로 60만 개의 소용광로가 만들어졌다.
거대한 용광로를 만들어 철강을 대량 생산하기에는 기술력도, 자본도 모자라는 상황에서 인해전술로 따라잡자는 것이다.

대약진운동이 성공한 것처럼 보인 것은 첫해뿐이었다. 공산정권은 1958년 공업생산량이 전해에 비해 무려 65% 초과생산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해에 기계 제작은 3배 증가했고, 석탄과 강철의 생산은 두 배, 석유는 70%, 전력은 40% 늘었다. 과장이 있었겠지만 큰 성과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런 성과 이면에는 토법고로의 비밀이 숨어 있었다. 일반 농민들은 철강 생산에 문외한이었다. 당에선 생산목표치가 내려왔다. 모택동의 지시이므로 하위 관료들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철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제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농민들은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기존의 고철을 녹여 새 강재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농민들은 고철을 주워 토법고로에 넣었다. 그것으로 목표를 채우기 힘들어 농기구와 트랙터와 같은 것을 고로에 넣었다. 나중엔 집안에서 쓰던 식기까지 용광로로 들어갔다. 어차피 인민공사에서 밥을 주므로, 가정에선 식기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불량률이 대단히 높았다. 국가기획위원회는 베이징에서 생산한 전체 철강 중 5분의 1만이 1등급이란 사실을 발견했다. 농촌 고로에서 생산된 강재로는 철도레일에 사용할 수 없고, 농기구로도 사용되기 힘들었다. 소형고로를 통해 생산되는 철은 흔히 말하는 똥철이었다. 불순물이 많은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철이었다.

 

대약진운동은 주창한 지 1년이 되는 1959년에 수직낙하하며 실패를 입증했다. 수량에 대한 추구는 품질에 대한 요구를 희생했다. 생산한 물건 중에 상당한 비중의 불량품이 나왔다. 혁명의 시대가 끝나고 실용의 시대가 오면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구호보다는 전문성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공업생산은 집단화와 혁명적 열기로 늘어나지 않았다. 재래식 설비와 생산방식으론 원료 낭비가 심했고, 소용광로에서 생산된 강재는 공업용으로 사용되지 못했고 폭풍우가 불자 용광로가 무너졌다. 집단농장과 집단공장은 생산목표를 맞추기 위해 기계를 과부하가 되도록 돌렸고, 정비와 수리도 제대로 하지 않는 바람에 고장이 잦았다. 생산도구는 빠른 속도로 파손되었다.

 

1959년에서 1961년까지 3년간 중국에는 대기근이 발생했다. 가뭄과 홍수가 겹친 탓도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참새잡이로 인한 환경파괴가 주원인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안후이성에서 총인구의 18%, 충칭 15%, 쓰촨 13%, 구이저우 11%, 후난 8%가 굶어 죽었다. 전체적으로 아사자가 1,700만~5,500만에 달했다고 한다. 1962년 공산당 기간당원 7.000명이 모인 칠천인대회에서 이 재난을 ‘삼분천화 칠분인화’(三分天災 七分人禍,)로 규정했다. 30%가 천재였고, 70%가 인재였다는 것이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그 결과로 모택동은 실권을 잃고 경쟁자 류사오치가 대신 그 자리에 앉는다. 공산당도 그를 버린 것이다.

한편, 중국의 대對소련 관계가 1950년대 말부터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모택동은 미국과 긴장 완화를 추구하기 시작한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게다가 소련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에 대항해 모택동은 이데올로기적 정통성을 강조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이유, 즉 경제의 실패로 실권을 잃은 것과 소련과의 관계 악화라는 상황에 직면해 모택동은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통제력을 되찾으려고 문화혁명을 시작했다.

 

실권을 잃어 국가 관료 내에서 기반이 약했던 모택동은 1966년 문화 분야에서 권력 투쟁을 시작했다. 1966년 3월 모택동의 친위대장 격인 린뱌오 당시 국방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문예라는 이 진지는 무산 계급이 아직 점령하지 못하고 자본가 계급이 확실히 점령하고 있어 투쟁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4월,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는 이런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모택동 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사회주의 문화혁명에 적극 참가하자.” 이때 ‘문화혁명’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모택동은 당권파를 권좌에서 제거하기 위해 기층 대중을 동원했다. 바로 이들이 홍위병이었다.

홍위병의 시작은 베이징대학교 철학과 시간강사인 녜위안쯔 등 7인이 베이징대학교 총장과 당 위원회 그리고 베이징 시당 위원회를 ‘반당 분자’이자 ‘반동’이라고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이면서였다.

 

모택동은 이 대자보를 “20세기 60년대 중국에서의 ‘파리 코뮌 선언서’”라고 칭송했다. 포퓰리스트 데마고기에 따른 운동을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국가였던 파리 코뮌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포퓰리스트 데마고기 -포퓰리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형태 )+데마고기(Demagogy)[ 거짓 약속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아첨 술책] 즉 날조와 선동 정책을 의미한다.

 

1966년 7월 27일 마오는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제목의 홍위병 대표단 성명서에 지지를 표명했다. 이에 고무된 홍위병들은 학교 당국과 주도적 국가 관료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젊은 홍위병들이 바로 문화혁명의 행동대 구실을 했다.

모택동은 홍위병의 열기를 등에 업고 1966년 8월 5일, “사령부를 포격하라”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령부’는 당권파를 뜻했다.

1966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이 모택동의 초상화를 들고 마오 어록인 붉은 책자를 흔들며 도시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홍위병은 문화혁명의 처음 기치인 네 가지 구습(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 타파를 넘어 당권파 자체로 공격을 확대했다. 모택동 파가 아닌 당 관료와 정부 관리들은 체포되어 고깔모자를 쓰고 거리를 행진해야 했고, 일부는 대중 집회에서 자신의 ‘반혁명적’ 행위를 고백하고 각종 ‘비판투쟁대회’에 끌려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66년 말에 1200만 명의 홍위병들이 베이징에 상경해 집회를 열었고, 모택동은 이들을 환영했다. 이들은 소위 혁명 경험을 교환하기 위해 다시 방방곡곡으로 흩어졌고, 자본가나 지주 등 소위 성분이 좋지 않은 인물들을 조리돌림 했다.

지방 권력 장악 투쟁과 내전

1967년 문화혁명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 당 중앙은 홍위병 운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운동이 노동자들과 군 사병들에게로 확산된 것이다. 이들은 지방, 성, 지구의 당과 행정기구로부터 ‘권력을 빼앗는’(脫權) 단계로 나아갔다.

 

모택동의 대중 동원은 그 결과가 뜻밖으로 나타냈다. 세 가지 상이한 유형을 살펴보겠다.

첫째, 모택동을 지지하는 노동자 집단이 노동자 파업을 진압하고 지방 권력을 장악한 상하이 사례.

둘째, 지방 당 조직·군대의 후원을 받는 노동자 조직과 마오 지지 노동자 조직이 내전에 돌입한 우한의 사례.

셋째, 가장 선진적인 정치조직이었던 후난성의 성무련 사례

 

중국에서 제조업이 가장 발전한 지역의 하나인 상하이는 1956년에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던 곳이었다. 상하이에는 안정적인 숙련 노동자들이 있었지만 국영기업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던 계약직과 임시직 노동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상하이 노동계급 내부의 처지와 요구가 서로 달랐고 가끔씩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문화혁명이 벌어졌다.

1966년 11월 방직공장의 젊은 노동자인 왕훙원(4인방 중 1인)이 자주적으로 등장한 상하이노동자혁명조반총사령부(약칭 노동자총사령부)를 지도해 상하이에서 당과 정부 조직을 와해시키고 그 지역을 통제하게 된다.

그런데 또 다른 노동자 조직인 상하이 ‘노동자 적위대’가 1966년 12월 31일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 파업으로 상하이가 마비되자, 모택동의 측근인 장춘차오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공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경제주의’라고 공격하며 비정규직과 임시직 처우 개선 등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듬해 1월 말 장춘차오는 보안경찰과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파업 노동자들을 진압하고 상하이 시당 위원회를 장악했다. 파업 노동자들이 진압당한 뒤에야 ‘모든 권력을 인민공사(코뮌)에게로’라는 슬로건이 상하이에서 울려 퍼졌다. 이는 이른바 ‘인민공사(코뮌)의 성격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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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인민공사와 비슷한 조직이 다른 지역에서는 혁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모택동 파가 당권파를 몰아내고 쟁의 참가 노동자들을 진압하면서 등장한 것이 인민공사이자 혁명위원회였던 것이다.

 

둘째 사례에 대해 이야기하자. 상하이에서는 파업이 벌어져 마오 세력에 의해 진압됐다면, 우한에서는 내전이 벌어졌다.

1967년 7월 우한에는 50만 명의 숙련 기술노동자들로 구성된 ‘백만웅사’(百萬雄師)가 지방 당 조직과 우한 군구 사령관 천 짜이다오(陳再道)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40만 명을 거느린 마오 지지 조직 우한 노동자총사령부가 지방의 당과 정부 권력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지방 당 조직과 군사령관 천 짜이다오로부터 무기와 군대를 지원받은 백만웅사가 마오 지지 조직인 노동자총사령부를 포위하여 공격했다. 결국 중앙 정부는 많은 군대를 동원해서야 천 짜이다오와 백만웅사를 진압할 수 있었다.

 

우한의 반란을 경험하고는 모택동은 내전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1967년 하반기에 모택동은 홍위병과 문화혁명을 확산시키자는 분파를 단속하고 대중 운동과 지역의 권력 탈취 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동원했다.

 

셋째 사례에 대해 이야기하자. 문화혁명으로 동원되어 명멸한 대중운동과 조직들 중에는 매우 급진적이고 정교한 논리를 갖춘 정치 조직도 있었다. 후난성에 있었던 성무련(후난성무산계급혁명파대연합위원회)이 바로 그런 조직이었다.

성무련은 지역의 청년·학생들과 노동자들로 이뤄진 그룹으로, 당시 중국 사회가 사회주의이긴 하지만 저우언라이로 대표되는 관료 집단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했다고 봤다. 성무련은 ‘붉은 자본가 계급’인 관료가 옛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 등장한 혁명위원회의 권력까지도 탈취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성무련은 파리 코뮌의 대중 민주주의에 기초해 인민공사를 설립하자고 주장했다.

성무련의 급진적 성격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들을 ‘무정부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했고 보안경찰과 군대를 통해 잔인하게 진압했다.

 

문화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대중 운동은 1968년 전반기에는 대부분 끝났다. 정적 제거와 실권 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모택동이 보기에 홍위병은 더는 정치적 유용성이 없었다. 게다가 홍위병은 모택동의 목적에서 더 나아가 당 조직 전체를 공격하면서 마오가 보기에 무정부주의적 위험을 낳고 있었다.

 

모택동은 문화혁명을 통해 당권파를 몰아내고 당과 국가 기구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에는 ‘계급대오정화’ 운동이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흑 5류(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악질분자, 우파분자) 출신자들이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이 운동의 진정한 목적은 문화혁명 동안 공격받았던 당 간부와 국가 관료들을 정치적으로 복권시켜 주는 것이었다.

린뱌오와 4인방의 몰락

1969년 4월에 중국 공산당 제9차 당대회가 열렸다. 그 당대회는 당시 국가 주석이자 마오쩌둥의 정적인 류사오치를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로 공표하면서 문화혁명의 ‘위대한 승리’를 자축했다.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대중 동원은 전혀 없었던 순전히 지배계급 분파들 사이의 책략과 갈등 그리고 정적 제거의 드라마였다.

 

가장 먼저 제거된 집단은 인민해방군(중국공산당이 이끄는 군대)의 지도자이자 모택동의 후계자로 공표됐었던 린뱌오와 그와 동맹자들이었다.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인민해방군의 세력이 커지고 그에 따라 린뱌오가 마오의 잠재적 경쟁자가 됐기 때문이다.

 

1971년 9월 린뱌오는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을 하다가 몽고에서 추락사를 당했다. 그가 죽은 뒤에 당권을 쥔 4인방(마오의 부인 장칭,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은 린뱌오가 노예제 사회를 지지했던 공자의 추종자라는 뜬금없는 비난을 하며 ‘비림비공’(린뱌오를 비판하라, 공자를 비판하라)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 운동의 진정한 표적은 당시 국가 주석이던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등소평)이었다.

그러던 터에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애도했다. 하지만 친모택동파 핵심 그룹인 4인방은 이를 방해했다. 이에 반대해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청명절인 4월 5일 톈안먼 광장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생활수준의 꾸준한 하락과 맞물린 오래된 불만과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1976년의 제1차 천안문 항쟁이다.

그런데 1976년 9월 9일에는 모택동이 사망했다. 모택동의 권위에 의존했던 4인방은 새 주석 화궈펑과 인민해방군의 원로들에 의해 제거됐다. 그들이 초래하는 불안정을 중국 관료 모두가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덩샤오핑이 주도권을 잡고 중국이 세계시장으로 다가가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4인방을 비롯한 친모택동 세력이 친노동자적이거나 반제국주의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친모택동 세력은 문화혁명 중에 노동자들의 주요 요구, 즉 임금 차별과 상여금 폐지, 평등한 분배 제도, 임시직·계약직 제도 폐지, 국가에 의한 할당이 아닌 노동자의 공장 및 기업 선택의 자유, 당의 노동조합 통제 폐지 등을 모두 묵살했다.

또, 1969년 중소 국경에서 소련과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자 핑퐁 외교를 거쳐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킨 것도 모택동과 저우언라이 그리고 4인방이었다. 그들은 나중에는 미국과 수교를 맺었고, 1971년에는 유엔에 가입했다. UN은 국제연맹의 후신으로, 레닌과 코민테른은 국제연맹을 “제국주의 강도들의 연맹”이라고 불렀는데 말이다.

 

모택동이 잃어버린 실권을 되찾기 위해 불러일으킨 환상에 고무돼 중국 노동계급이 상당 부분 동원됐지만, 성무련의 사례에서 보듯이 중국 사회의 성격과 모택동주의에 대한 정치적 착각으로 인해 대안적인 세력이 되지 못했다.

 

특히, 1952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탄압으로 제거되고, 1956~57년에는 모택동에 대항할 다른 세력들도 모두 탄압을 당한 뒤라, 문화혁명이 시작될 시기에는 독립적 좌파가 존재하지 않았다.

 

1989년 2차 천안문 항쟁 때도 비슷한 양상이 재현됐다. 중국 사회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정치적 명료함과 이에 기반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조직의 건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출처: 노동자연대 마오쩌둥과 문화혁명 ─ 신화와 진실https://wspaper.org/article/28469 이정구  부산대학교 중국연구소 객원연구원

 

1979년 미국과 국교를 수립한다. 1989년 6월,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다. 등소평은 사회주의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군중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소평은 중국을 개방하고 시장 경제를 도입하여 오늘날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끈 1등 공신으로 인정받고 있다.

 

2차례에 걸친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지만 이미 너무 길어진 포스팅에 이 점은 다음에 이어가 보도록 하자

 

모순 그 자체를 보여주는 중국이라는 국가엔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위험한 선동가와 뻥쟁이 날조가가 판을 치고 있으며 그들에 놀아나기 시작하면 1-2천 명이 아닌 1-2억 명이 휘둘리는 스케일을 가진 나라인 만큼 제발 비판적인 사고와 판단이 요하는 국민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기는 그런 국민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 등쳐먹는 지도자나 선동가가 나오는 거겠지.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말이고 한두 번 당하고도 또 당하면 당한 놈이 병신이라는 말이다. 평등 분배를 말하며 누구나 잘사는 세상을 만들자란 감언이설에 속아 아직도 공산주의라는 말에 공산당에 빨대 꼽혀 고혈을 쪽쪽 뽑히고 있는 10억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도 당연한 듯 당하고 있는 중국인을 보면  누가 그들을 구원하랴. 앞으로도 지금처럼 불만 없이 당하면서 잘 살았으면 한다. 다만 중국을 벗어나서 민폐짓은 그만 좀 자제해 달라. 중국 내에서 그렇게 만족하면서 산다면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말이다. 

 

출처:소박한 독서가의 서재https://moonlgt2.tistory.com/중국의 역사정리(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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